작품의 서사
1. 이명
“3기입니다. 임파선 전이가 보이고요. 그래도 치료 잘 받으시면 됩니다. 항암 하시면서 체력 관리 잘하시고, 그러면 이겨내실 수 있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음 단단히 잡수십쇼!” 갑자기 ‘삐이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삐이이 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줄곧 이명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요즘 부쩍 살이 빠져 기뻤는데 내 몸 안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다니 나도 참 바보 같다. 아픈 줄도 모르고 허리 사이즈가 줄었다고 좋아했다니. 나는 내가 삶에 초연한 줄 알았다. ‘고달픈 인생, 오늘 가면 어떻고 내일 가면 어떠하리.’ 그런데 막상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고 생각하니 겁이 난다. 걱정도 되고... 내가 죽으면 우리 딸이 많이 슬퍼할 텐데 미안하다. 그리고 수희에게도 미안하다. 가엾은 아이 오수희. 내 이름, 제대로 불려보지 못한 나의 이름이다.
2. 내 이름은 오수희
“빼어날 수에 기쁠 희” 내 이름은 수희다. 그런데 사람들은 날 바리라고 불렀다. 오.바.리. 듣기 싫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싫다고 한 번만이라도 이야기를 해볼걸... 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날 내다 버리라고 했단다. 내리 딸만 다섯이었던 아버지는 여섯째인 나마저 딸인 걸 알고 더 이상 딸내미는 쓸데없다며 갖다 버리라고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언니들과 엄마가 울며 통사정한 덕에 난 버려짐을 면했지만, 한동안 이름 없이 바리내(버린 애)로 불렸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인가 사람들은 날 오바리라고 불렀다. 오발탄의 오바리...내가 세 살이 되던 해 드디어 우리 집에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내 남동생 수찬이를 호적에 올리는 그날 기쁨에 들뜬 아버지는 내 이름도 덩달아 호적에 올려주었다. 빼어난 기쁨 오수희.
3. 꿈을 꾸었더라면?
14살(1973년) 때 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우리 마을에서 그해만 다섯 어른이 파도에 휩쓸려 가셨더랬다. 아버지도 그중 하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삶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술과 눈물로 마음을 채워나갔다. 7남매 모두 두려웠다. 그리고 그해 말 큰언니는 엄마가 지긋지긋하다며 어느 미군을 만나 미국으로 시집을 가버렸다. 큰 사람 둘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우리는 가장이 필요했다. 누군가는 정신 차리고 우리 가족을 지탱해야 했지만 우리 모두는 어렸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교실이 아닌 공장에서 책과 연필 대신 가발을 손에 쥐기 시작했다.
4. 오순도순
“엄마! 엄마는 저 아줌마처럼 다시 결혼하지 말고 나랑 엄마랑 할머니랑 이렇게 오순도순 같이 살자!”얼마 전 사무실 동료를 통해 한 남자를 소개받아 몇 번 만나봤다. 꽤 인상도 좋고 생활력도 있어 보이고, 무엇보다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안 그래도 이 남자와의 삶에 대해서 고민 하고 있던 찰나 드라마를 보던 11살 내 딸아이의 한마디에, 마치 몰래 잔치 음식 훔쳐 먹다 걸린 사람마냥 뜨끔했다. 남편도 없이 시집 식구들이랑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고민을 많이 했다. 이 어린 녀석이 그래도 할머니와 삼촌 고모들 속에 살면서 사랑받고 있는데 나 살자고 그걸 떼어 놓는 게 맞을지,,.‘그래. 미안해 딸. 엄마가 잠깐 미쳤었나 봐 우리 이렇게 다 같이 오순도순 살자’
5. 전화기 너머
“여보세요? 엄마 뭐해?” “응? 아... 어디 가는 중이야 나중에 통화해 끊을게 미안” “잠깐! 지금 밤인데 이 시간에 어딜 가? 설마 또 이모한테 가고 있어? 그냥 둬 가지 말고 엄마 가족은 엄마랑 나야!! 제발 신경 좀 꺼!” “알겠어... 미안해... 나중에 통화해...”
다섯째 언니인 허연 스님은 종종 만나면 우스갯소리로 우리 집에는 술마귀가 산다고 했다. 엄마를 시작으로 둘째 형부, 넷째 언니, 막내까지 내가 시집오기 전부터 다들 술독에 빠져 살다시피 했다. 그래서 도망치듯 시집을 왔는데 술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밤이면 울리는 전화기 너머 술에 취한 식구들의 목소리가 들으면 어느새 나는 그들에게 달려가고 있다. 내가 가지 않으면 무슨 사고가 날것만 같아서... 내 딸은 한사코 말리지만 난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식군데... 저렇게 힘들다는데... 그냥 죽으라고 둘 수는 없으니까...
“미안해 내 딸“
6. 불쌍한 언니
“바리야 바리야!!” “여보세요? 언니? 왜 그래? 울지 말고 말 좀 해봐!! 응? 언니?” “바리야 바리야 어떻게 하면 좋냐 아이고 바리야 ” “언니!! 정신 차리고 말 좀 해봐 왜 그래?”
둘째 언니는 단칸방에서 엄마와 형부 그리고 두 딸과 평생을 살았다. 형부가 사고를 쳤을 때도, 아이들이 넘어져 다쳤을 때도 늘 나를 찾았다. 이번에는 엄마가 쓰러지셨다. 나는 급하게 119를 부른 후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언니는 사색이 되어 울고 있었다. 겨우 언니를 진정시키고 물었다.
“언니? 바로 119 부르지 왜 나한테 전화했어? 의사가 조금만 더 시간이 지체되었으면 큰일 날뻔했다는데. 응?” “몰라 바리야. 난 그런 거 잘 못하는데 넌 뭐든지 다 잘하잖아. 그냥 네가 먼저 생각이 났어.”
7. 엄마의 유산
3개월 정도 병원 생활을 했던 엄마는 단풍이 붉게 물든 어느 가을날 병실 침대에서 눈을 감았다. 미국에 간 이후로 연락이 안되는 큰 언니와 막내 수찬이만 빼고 우리 남매들이 다 보는 앞에서... 비교적 편안하게... 엄마랑 평생 함께 살았던 둘째 언니는 그날 이후 밤마다 꿈에 엄마가 나타난다며 두려움 반, 걱정 반으로 한동안 매일 같이 전화를 했다. 셋째 언니와 넷째 언니도 한동안 만날 때 마다 병원비를 보태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토로했다. 병원비 내는 게 뭐 대수라고. 누군가는 낼 수 있다는 게 다행인 거지. 엄마는 돌아가시면서 우리 남매들 아무도 몰랐던 재산을 공개했다. 경기도 송추에 있는 엄마 친정의 작은 땅이었다. 그 땅은 수찬이 몫이라고 했다. 가난에 힘겨워했던 지난 시절에도 엄마는 어떻게든 그 땅을 아들에게 온전히 건네주고 싶었나 보다. 우리들한테 꽁꽁 숨겼던 걸 보면... 엄마는 나한테도 남겨준 것이 있다. 다른 언니들도 아닌 내 손을 꼭 잡고 나에게 남긴 건 한 마디의 말이었다.
“애썼어”
미안함, 서운함, 안도감 등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 여러 감정이 눈물과 함께 밀려왔다.
8. 다시 돌아간다면
후회는 없다. 어쩔 수 없는 내 팔자였다.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래도 그 시절 수희는 너무 가여웠던 것 같다. 만약 내가 그때의 수희를 만날 수 있다면?... 난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